성보 2009. 11. 11. 12:59

담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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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징(曇徵,579-631)은 고구려 영양왕 21년<610>에 백제를 경유하여 도일(渡日)하였다. 학승이자 화가인 담징은 그가 학승이나 화가였다는 것보다 문화의 창달자임과 동시에 문화서의 전파자였다는 데 있다. 그는 오경(五經)에 능통하고 또 채색, 지묵(紙墨), 맷돌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610년 3월 법정(法定)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성덕태자의 환영을 받고, 나라에 있는 법륭사에 주석하였다.

이곳에서 유명한 법륭사 금당벽화를 완성하여 불후의 명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에 채색·지묵·공예를 전해 준 담징은 일본불교에 불화 기법을 전한 문화 사절로서 손꼽을 만한 인물이며 그가 그린 금당벽화는 근세까지 전하여 중국의 운강석불, 경주 남산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 미술품의 3대 걸작으로 세인의 시선을 끌었으나 1948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지만 현재의 불전(佛殿)에는 모사(模寫)된 벽화가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윈깡 석굴, 우리 나라의 석굴암, 그리고 일본의 호류우사 금당벽화

 

석굴암은 신라 사람 '김대성'이 만들었고, 일본 호류우사 금당벽화는 고구려 때의 스님인 담징이 그렸습니다.

담징은 고구려 영양왕 때의 사람입니다. 그림을 잘 그려서 불당 안의 탱화들과 유명한 스님들의 모습을 많이 그렸습니다. 담징의 명성은 일본에까지 알려져서 때마침 일본의 성덕태자가 만든 호류우사라는 절에 그림을 그릴 사람으로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시퍼렇게 굼실거리는 동해의 푸른 물결을 바라보며 담징은 생각했습니다.
'성덕태자는 불심이 매우 깊으신 분이라던데... 이번에 지은 호류우사는 일본에서 가장 큰 절이라지?'
'어떻게 하면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잘 그릴 수있을까? 내가 과연 해낼 수있을까?'
'많은 중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조금이라도 부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난 어떤 고생을 해도 괜찮아.'
사실 그동안 몸담았던 절을 떠나서 멀고 먼 남의 나라에 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고 풍습도 다를테니까요.
담징을 초대한 성덕태자(쇼오토쿠태자)는 일본 천황의 둘째아들로서 총명하고 학문에 밝아서 많은 업적을 쌓았던 사람입니다. 불교에 깊은 관심을 보여 백제와 고구려에서 뛰어난 스님이나 화가, 기술자들을 초대해서 불교문화를 일으키는데 힘썼습니다. 백제의 아좌태자가 그려준 성덕태자의 초상화는 지금도 일본의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담징은 며칠 후 몸을 깨끗이 씻고 가사(스님들이 어깨에 걸치는 옷)도 새로 갈아 입은 후, 그림 그릴 채비를 했습니다. 막 금당의 벽에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을 그리려고 붓을 들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스님, 스님, 수나라의 100만 대군이 고구려로 쳐들어 왔답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조국이 전쟁 중이란 소식에 담징은 붓을 들 수 없었습니다.

`지금쯤 우리 백성들이 수나라 군사들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비록 미약하나마 이 한몸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담징은 고구려의 승리를 기원하며 매일 매일 먹지도 않고 고행에 들어 갔습니다.
당시 중국 대륙은 수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후, 주변 나라들로 세력을 넓혀 가던 때였습니다. 100만 대군이라면 엄청난 숫자입니다. 지금 서울의 인구를 1100만으로 잡는다면 얼마나 많은 숫자인지 짐작이 가겠지요? 고구려 사람 모두가 불안에 떨었습니다. 수나라 임금 양제는 100만 대군 중 우수한 30만 군사를 보내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을지문덕이라는 훌륭한 장수와 백성들이 똘똘뭉쳐 힘을 모으고 지혜를 짜냈습니다.

"여봐라, 마을에 남아있는 식량을 모두 성안으로 옮기고 병사들은 살수(지금의 청천강) 상류에 둑을 쌓도록 하여라."

결국 군량미가 떨어져 기진맥진한 수나라의 대군이 후퇴하려 청천강을 건널 때, 을지문덕은 상류의 둑을 터뜨려 수군을 쫓아 버렸습니다. 수나라 군사는 겨우 2700여명만 살아 돌아갔습니다. 이 싸움이 유명한 '살수대첩'입니다.

"스님, 기뻐하십시요. 고구려가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답니다. 이제는 안심하시고 그림을 그리셔도 되겠습니다."

그 동안 그림을 재촉하고 싶어도 말을 할 수 없었던 일본 스님이 얼굴에 웃음을 띄고 달려 왔습니다.

"그 말이 정말이오? 그게 사실이라면 내 지금 당장이라도 금당에 그림을 그리리다. 어서 준비를 해 주시오."

서둘러 호류우사에 도착한 담징은 먼저 부처님께 합장을 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조국을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부처님."

담징은 경건한 마음으로 눈을 감고 금당 벽을 향해 앉았습니다. 이제는 조국의 전쟁 생각도, 다른 모든 생각도 다 몰아 내고 오로지 평화로운 마음으로 부처님만 생각해야 했습니다. 지나친 욕심이나 다른 생각을 하면서 관세음보살을 그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윽고 붓을 들어 조용히, 때로는 격정적으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 금당 안은 정적만이 감돌았습니다. 슥, 슥, 붓질하는 소리만 들렸습니다. 담징의 눈은 알 수 없는 먼 곳을 바라보며 광채로 번뜩였습니다. 한 획, 한 획, 그을 때마다 온 정신을 쏟아 그렸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여러 보살 중에서도 가장 인간과 친한 보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모습으로 그려야할 지 막막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관세음보살의 신비한 미소를 그릴 수 있을까? 내 능력 밖의 일일까? 혹시 나의 불심이 모자라는 것은 아닐까? 아아! 나무아미타불, 제발 제게 이 그림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요.'
거의 다 완성되었다 싶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깝단 생각없이 과감히 지워버렸습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며칠씩 날을 새운 담징은 어느 날 아침, 가까스로 벽을 향해 합장을 하고 '스스르' 미끄러지듯 쓰러졌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들리는 맑은 새소리에 잠을 깬 담징은 누군가 포근하고 따사로운 미소를 띄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천천히 눈을 들어 바라보자 그곳에는 마치 자애로운 어머님과 같은 모습으로, 모든 중생을 가슴에 품을 듯이 관세음보살이 앉아 계셨습니다.
둥그스름한 턱, 불그레하게 번지는 양 볼의 홍조, 살포시 내려 뜬 상냥한 눈, 몸위에 가볍게 늘어지는 옷, 마치 숨을 쉬고, 피가 흐르는 듯 살아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전체적으로 2m가 넘는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보기에 따라 엄하게도 보이고 한없이 부드럽게도 보였습니다. 콧날이 오똑하고 쌍거풀진 눈이 서양미술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 오래 전에도 동, 서양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는 사실이 놀랍지요?
이렇게 담징의 나이 34세(613년)에 완성된 호류우사 금당벽화는 1948년에 호류우사에 큰 불이 나서 안타깝게도 불타버렸습니다.
담징은 금당벽화 이외에도 일본의 불교와 문화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종이, 먹, 벼루 만드는 법을 가르쳤으며, 화장할 때 쓰는 연지도 전해 주었습니다.

담징 이외에도 일본에 우리 나라의 문화를 전파한 사람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백제의 왕 인과 아직기, 혜 스님...등등. 왕 인은 일본에 '논어'를 처음으로 소개해 한학을 전한 백제 사람입니다. 지금도 일본학자들은 일본 성리학의 선구자로 왕 인 박사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담징이 금당벽화를 완성한 시기가 수나라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 이듬해라는 사실은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백제, 신라를 포함한 우리 나라의 불교는 왕이나 귀족들이 먼저 받아 들여서 퍼뜨린 것입니다. 요즈음은 국민 스스로 종교적인 믿음이 필요할 때 하나 둘씩 받아들여 믿는 것이지만 그 때에는 왕이 권한을 강화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임금님은 위대하고 자비로운 부처님의 은덕을 입으신 분이라네. 그래서 언제나 부처님이 보살피신다지? 우리도 이젠 더 이상 전쟁 없이 편안히 살게 될거야."

이런 생각을 백성들로 하여금 믿게 해서 왕 밑에 모두 모이도록 했습니다. 전쟁에서 진 백성들에게 온화한 부처님의 미소는 고통에서 구원해 주는 듯했습니다. 왕을 살아있는 부처로, 귀족을 살아있는 보살로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삼국시대의 불상조각이나 그림들은 신비한 느낌을 주며 아주 친근한 미소를 띄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백성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서지요.
이렇게 해서 우리 나라의 불교는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 나갔습니다. 또 나라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호국불교'로 독특하게 자리 잡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