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보 2011. 6. 29. 14:24

다시 태어난 김대성(金大城)

자료제작 ; 나천수

*[삼국유사(三國遺史)]의 효선(孝善) 편에 나온 내용을 발췌하였음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승려 일연(一然:1206~89)이 신라·고구려·백제 3국의 유사(遺事)를 모아 지은 사서(史書). 5권 2책. 인본(印本). 〈삼국사기〉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역사와 문화를 종합적으로 전해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경주·토함산>]

지금의 경주 땅 모량리(牟梁里)에 경조라는 한 가난한 여인이 아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들은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하여 생긴 모습이 마치 성과 같다 하여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불렀다.그는 이웃망르 부자 복안(福安)의 집에 가서 품팔이를 하며 그 집에서 얻은 몇 이랑의 밭을 갈아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점개(보살의 경지에 이른 스님)라는 스님이 복안의 집을 찾았다.

『스님, 어서 오십시오. 이른 아침부터 어인 일이신지요?』

『소승 홍륜사에서 개최할 육륜법회에 필요한 불사금을 화주키 위해 이렇게 일찍 마을로 내려왔습니다. 정성껏 시주하셔서 부디 공덕을 지으시길… 나무관세음보살.』

『스님, 저는 베 50필을 공양 올리겠사옵니다.』

『신도가 즐겨 보시를 하면 천신이 항상 보호하여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게 도리 뿐 아니라 안락과 장수를 누릴 것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점개 스님이 이렇게 축원하는 말을 옆에서 물끄러미 듣고 있던 대성은 급히 어머니에게 뛰어갔다.

『아니 무슨 일이기에 숨이 턱에 차도록 이리 급하냐?』

『어머니, 지금 막 어느 스님이 주인 어른께 하는 말을 들었는데요, 하나를 보시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했어요. 아마 우리는 과거에 좋은 일을 해놓은 것이 없어서 이같이 가난

한가 봐요. 그러니 지금 보시를 안하면 내생에는 더욱 가난할 것 아니겠어요?

어머니, 제가 고용살이 해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하였으면 합니다.』

『그래, 참으로 기특한 생각이구나. 그렇게 하도록 하자.』

어머니의 승낙을 받은 대성은 다시 복안의 집으로 달려가 점개 스님에게 밭을 시주했다.

그 후 얼마 안돼서 대성은 이유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다. 대성이 죽던 날 밤은 유난히 별이 총총했고 재상 김문량의 집에는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면서 하늘에서 큰 별이 그 집을 향해 떨어졌다.

『모량리 대성이란 아이가 네 집에 환생하리라.』김문량의 집 식구들은 모두 놀라 자신의 귀를 의심했으나 누구 하나 빠집없이 그 소리를 들었던 것이다.

김문량은 곧 사람을 시켜 모량리를 조사시켰는데 그날 밤 대성이 죽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김문량의 아내는 태기가 있어 10개월 후 아들을 낳았다.

아기는 건강했고 이목이 뚜렸했다.그런데 이상하게도 왼손을 꼭 쥔 채 펴지 않더니 7일만에 펴는 것이었다. 아기의 손바닥에는 「대성」이라 새긴 쇠붙이가 있었다.

김문량의 집에선 아기를 대성이라 이름하고 그 어머니(경조)를 모셔다 후히 대접하고 봉양했다.재상의 아들로 환생한 대성은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환경에서 씩씩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장성하면서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가 곰을 잡았다.그날 밤 산밑 마을에서 유숙한 대성의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신하여 나타났다.

『어째서 너는 나를 죽였느냐? 내 다시 환생하여 너를 꼭 잡아먹을 것이니라.』

귀신이 당장 잡아먹을 듯 호령을 하자 대성은 두려워 벌벌 떨면서 용서를 빌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하여 주십시오. 별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사냥을 좋아하다 보니 남의 생명 귀한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세세생생 다시는 그런 잘못이 없을 것이오니 너그러이….』

대성이 눈물을 흘리며 진실로 뉘우치니 귀신은 화를 가라앉힌 듯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네가 나를 위해 절을 세워 주겠느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성은 선뜻 맹세를 했다. 「이제 살았구나」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꿈에서 깨 보니 잠자리는 땀으로 흠벅 젖어 있었다.

그 후 대성은 그 곰을 잡았던 자리에 장수사(일명 웅수사)를 창건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성은 깊은 대비원을 발하게 됐다.

경전 공부에 열을 다하고 사찰 참배 기도에 전력하던 대성은 부모은중경을 읽으면서 효사상을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일 뿐 아니라 인간이 지켜야 할 근본임을 깊이 깨달았다.

대성은 부모를 위해 절을 세우기로 원력을 세웠다.그는 현세 부모를 위해 불국사 건립의 대작불사를 시작했다.

『사바세계의 불국, 그리고 극락세계와 연화장세계의 불국도량을 이룩하여 부모의 명복을 기원하고 나라의 안녕과 모든 자연의 보호, 그리고 나 자신의 구원을 기원하리라.』

김대성의 발심은 드디어 대가람을 이룩했다. 그러나 대성은 불국사 건립으로 자신의 기도가 끝났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는 가난한 시절에 자기를 키우느라 애쓰셨고, 선뜻 밭을 보시하신 전생의 어머니와 일찍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영령을 천도하고 은혜에 보답키 위해 토함산에 석불사를 세웠으니 그 절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늘의 석굴암이다.

특히 신라 오악의 하나로서 영산으로 알려신 토함산과 그 기슭에 전생과 현세 부모를 위해 절을 창건한 김대성은 그 대작불사에 신라인의 호국염원을 발원하기도 했다. 그것은 토함산이 군사적 요새라는 점에서 후세인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밭 한 뙈기를 공양 올린 공덕으로 김대성은 우리 민족의 존귀한 유산이며 귀의처인 가람을 세워 후세인에게 존앙을 받게 되었으니 신라의 문장가 최치원은 다음과 같이 예찬하고 있다.

「(상략) 화엄에 눈을 대고 연장을 보며 일불국에 마음 돌려 안양을 찾네/ 마산(魔山)에서는 독장(毒?)을 평평하게 하려 하니/ 마침내 고해에서 경랑(驚浪)을 없게 하도다/ 귀중한 스님의 한 말씀 법시(法施)를/ 단원이 마음 바쳐 따르기를 기약하네 (하략)」

 

- 불교설화(佛敎說話) -

 

 

 

 

 

 

김대성

700년경~774(혜공왕 10).

신라 경덕왕 때 정치가이다.

재상을 지낸 문량의 아들. 745년(경덕왕 4) 집사부의 중시가 되었다가, 750년에 물러났다.

전세(前世)와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 지금의 석굴암)를 창건하였다,

활동시기 : 700~774

출생일 : 700년(효소왕 9)

사망일 : 774년(혜공왕 10)

시대 : 통일신라시대

김대성의 업적

1. 불국사와 석굴암의 건립

2. 다보탑과 무영탑(석가탑)을 조성

3. 백운교(白雲橋)·연화교(連華橋)·사성교(四城橋)·사미교(沙彌橋)·도살교(到薩橋)·팔도교(八道橋) 등 13개의 다리를 놓았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으며,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고 불렀다. 경덕왕은 신라 중기의 임금으로 그의 재위기간(742∼765) 동안 신라의 불교예술이 전성기를 이루게 되는데, 석굴암 외에도 불국사, 다보탑, 석가탑, 황룡사종 등 많은 문화재들이 이때 만들어졌다.

토함산 중턱에 백색의 화강암을 이용하여 인위적으로 석굴을 만들고, 내부공간에 본존불인 석가여래불상을 중심으로 그 주위 벽면에 보살상 및 제자상과 역사상, 천왕상 등 총 40구의 불상을 조각했으나 지금은 38구만이 남아있다.

석굴암 석굴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뛰어난 기술이다.

석굴암 석굴의 입구에 해당하는 전실에는 좌우로 4구(軀)씩 팔부신장상을 두고 있고, 통로 좌우 입구에는 금강역사상을 조각하였으며,

좁은 통로에는 좌우로 2구씩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상을 조각하였다.

원형의 주실 입구에는 좌우로 8각의 돌기둥을 세우고, 주실 안에는 본존불이 중심에서 약간 뒤쪽에 안치되어 있다. 주실의 벽면에는 입구에서부터 천부상 2구, 보살상 2구, 나한상 10구가 채워지고, 본존불 뒷면 둥근 벽에는 석굴 안에서 가장 정교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서 있다.

원숙한 조각 기법과 사실적인 표현으로 완벽하게 형상화된 본존불, 얼굴과 온몸이 화려하게 조각된 십일면관음보살상, 용맹스런 인왕상, 위엄있는 모습의 사천왕상, 유연하고 우아한 모습의 각종 보살상, 저마다 개성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나한상 등 이곳에 만들어진 모든 조각품들은 동아시아 불교조각에서 최고의 걸작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주실 안에 모시고 있는 본존불의 고요한 모습은 석굴 전체에서 풍기는 은밀한 분위기 속에서 신비로움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의 본존불은 내면에 깊고 숭고한 마음을 간직한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로움이 저절로 전해질 듯 하다.

석굴암 석굴은 신라 불교예술의 전성기에 이룩된 최고 걸작으로 건축, 수리, 기하학, 종교, 예술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더욱 돋보인다. 현재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출처] 삼국유사, 삼국사기전집

 

 

김대성과 불국사에 얽힌 의문

 

김대성은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경덕왕 때였다. 대상 대성이 천보(天寶) 10년 신묘년(751)에 비로소 불국사를 지었다. 혜공왕 때를 거쳐 대력(大歷) 9년 갑인년(774) 12월 2일에 대성이 죽자, 나라와 집안에서 일을 마쳤다”고 적었다. 이는 절에서 전해오는 기록이라 하였다.

 

불국사와 석굴암의 우수성은 달리 말할 필요도 없다. 일연마저 “불국사의 구름다리와 석탑 그리고 강당을 조각한 석목에 들인 공이 경주의 여러 절 가운데 이보다 더할 것이 없다”라고 찬탄하였다. 경주에 절이 한둘 아니요, 불교적 힘을 말하자면 이보다 더한 절이 있겠건만, ‘들인 공’을 따져서 두 절을 따라갈 곳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자금 누구라도 이 말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성 자신은 수수께끼 속의 인물이다.

대상이라 한 것을 보면 상대등이나 각간 같은 최고의 관직에 오른 이로 보이지만, [삼국사기] 쪽에서는 그의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불국사와 석굴암 같은 국가적 사업에 준할 거대한 사찰을 지은 이라면 공이 남다를 텐데 말이다.

 

두 절만 해도 그렇다. 김대성이 지었다는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명백하지만, [삼국유사] 안에서도 신문왕 때와 경덕왕 때로 그 시기가 갈리고,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불국사 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에는 법흥왕 15년(528)에 왕의 어머니인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으로 지었다 했다. 그런가 하면 [불국사 사적(事蹟)]에는 이보다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다는 기록마저 보인다.

 

김대성은 그 이력이 분명하지 않고, 불국사의 창건 기록은 여러 가지이다. 김대성에 대해서는 다분히 설화적인 전기가 [삼국유사]에 자세하지만, 이로써 그의 전모를 알기보다는 어쩐지 더욱 신비스러운 인물로 달려가 버리고 말았다. 분명 문제적인 인물에 틀림없는 김대성의 설화적 삶을 우리는 어떻게 볼 것인가. 불국사의 창건에는 어떤 정치적인 함의가 도사리고 있는가. 이제부터 우리가 찾아가 해결할 의문점이다.

 

금빛 간자를 쥐고 태어난 아이

 

너무 큰 것은 너무 커서 평범한 이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어쩌면 이 말은 김대성과 불국사 그리고 석굴암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른다. 우선은 [삼국유사]의 기록을 따라 김대성이 누구인지 살펴보자.

 

일연은 신문왕(재위 681~692)이 다스리던 때라고 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모량리에 사는 경조(慶祖)에게는 머리가 크고 이마가 넓기를 마치 성 같아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여 키울 수 없게 되자, 재산이 많은 복안(福安)의 집에 고용살이로 들여보냈다. 그 집에서 밭 몇 도랑을 나누어 줘 먹고 입는 데 썼다. 밭 몇 도랑에 아들을 넘긴 셈이었다.

어느 날 대성은 복안의 집에서 절에 시주하는 것을 보았다. 시주를 받은 승려는 “하나를 시주하면 받는 것은 만 배/편안히 즐거우며 오래 살리이다”라고 축원해 주었다. ‘하나를 시주하면 받는 것은 만 배’라는 말에 대성은 아찔했다. 그는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에게 말했다. “우리는 분명 쌓아 놓은 선행이 없어 지금 이렇게 고생하는 것 같아요. 이제 또 시주하지 않으면, 다음 세상에서 더욱 힘들어지겠지요? 작지만 저희가 가진 밭을 절에 시주해서, 다음 세상에 갚아주시길 바라는 게 어떨까요?” 머리가 큰 만큼 계산도 빨랐던 모양이다. 다행히 어머니는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만 배의 복을 받기는커녕 얼마 있지 않아 대성이 죽었다. 날벼락이었다. 그러나 극적인 반전은 바로 다음에 따라왔다. 이것이 이야기의 묘미이다. 이날 밤 나라의 재상인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모량리의 대성이라는 아이가 이제 네 집에 의탁하러 온다”는 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집안사람들이 크게 놀라, 사람을 시켜 모량리의 대성을 찾아보게 하니, 과연 그날 죽었다. 김문량의 부인은 이 일로 아이를 가졌다.

 

그러나 이 아이가 대성인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다음 장치가 따라나온다. 태어난 아이는 왼쪽 손을 꽉 쥐고 펴지 않았다. 7일 만에야 손을 열었다. 아이는 금빛 간자를 쥐고 있었던 것인데, 거기에는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 있었다. 모량리의 김대성이 증명되는 순간이다. 대성은 본디 어머니 경조를 모셔다 함께 봉양했다.

 

불국사와 석불사를 짓다

 

두 번 태어난 대성은 이로써 ‘하나를 시주하면 받는 것은 만 배’의 징험을 보았는가. 아직 아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더욱 극적으로 달린다.

 

대성은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 마리를 잡았다. 사냥을 마치고 산 아래 마을에서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나타났다. 깨어나서 보니 땀이 흘러 이불이 온통 젖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사나운 꿈이었던 모양이다. 곰 귀신은 대성에게 까닭을 따졌다. 그러나 까닭이 따로 있겠는가. 사냥을 했으면 그뿐이지. 대성은 그저 용서를 빌 따름이었다. 그러자 귀신은 ‘나를 위해 절을 지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흠칫, 대성은 이제 살 길이 보이는구나 싶었다. 당연히 맹서하였다.

 

잠에서 깬 대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을 것이다. 절에 시주한 덕분에 잘살게 된 자신이건만 살생을 일삼은 일이 후회스러웠을 것이다. 사냥부터 그만두었다. 그리고 곰을 잡았던 땅에다 장수사(長壽寺)를 지었다. 대성은 지금까지 누리던 부유와 다른 충만한 행복을 느꼈다. 자비를 베풀리라는 소원 또한 돈독해졌다. 이는 분명 대성의 세 번째 탄생이라 보아 틀림없다.

 

대성은 본격적인 불사(佛事)를 시작하였다. 지금의 부모 두 분을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지은 것이다. 석불사는 지금의 석굴암이다. 여기에는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이라는 당대 최고의 승려를 모셨다. 불상을 세우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하였다.

석불사를 만들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큰 돌 하나를 다듬어 탑의 지붕으로 올리려 하는데, 갑자기 셋으로 쪼개져 버렸다. 대성은 분하고 화가 났다. 그러다 설핏 잠에 들었다. 그러는 사이 밤 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다 끝내고 돌아갔다. 아침에 일어나서야 대성은 그것을 발견하였다. 감탄하는 마음으로 그는 당장 남령(南嶺)으로 달려나가서, 향나무를 태워 천신에게 공양을 드렸다. 이로부터 남령은 향령(香嶺)이라 불렀다.

 

 

일연이 바라 본 김대성

 

일체의 정치적인 해석을 뺀다면 김대성의 이야기는 효심과 불심을 보이려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효행이 뛰어난 이를 모아놓은 자리이다. 먼저 진정(眞定) 스님이 나오고, 이어서 바로 김대성이다. 뒤를 잇는 향득(向得), 손순(孫順), 지은(知恩)에 비해 훨씬 비중 높은 둘을 앞에 배치했다. 진정은 홀어머니의 눈물겨운 주먹밥을 먹으며 의상 스님의 문하에 들어 그 10대 제자가 된 사람이다. 실화에 바탕을 둔 이야기임에 틀림없다. 김대성은 그 점에서 달랐지만 지극한 효성의 아들임에는 같다.

 

김대성은 가난한 집의 홀어머니를 둔 아들이었다는 점에서 일연과 공통점이 있다. 어쩌면 이것으로 일연 자신의 처지를 떠올릴 수 있다. 가난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 홀어머니를 두고 평생 승려의 길에 세상을 떠돈 이가 일연이었다. 그러기에 일연에게 효행은 신앙과 거의 버금가는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 일연으로서는 김대성의 역사적 실존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는 김대성의 이야기 끝에 부친 일연의 시를 통해 입증된다.

 

모량리 봄 지난 뒤에 세 이랑 밭을 시주했거니

향령에 가을이 와 만 배나 거뒀네

전생 어머니 평생 가난하다가 부자가 되고

재상은 한 꿈 사이에 두 세상을 오갔네

 

일연은 “한 몸으로 전생과 현생의 부모를 모시니, 이는 예부터 듣기 힘든 일이다. 시주를 잘한 증험(證驗)을 믿지 않을 수 없구나”라고 총평한 다음, 이 시를 붙였다. 모량리의 봄과 향령의 가을을 병치시키면서, 김대성의 일생을 효행의 그것으로 요약한 시이다. 일편 시주를 강조하는 다분히 불교적인 포교시처럼 보이나, ‘한 꿈 사이에 두 세상을 오갔다’는 대목이 절창이라면 절창이다. 일연은 김대성의 이야기가 요즘 말로 치면 설화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만 한 생애가 꿈처럼 달라지는 세상의 절묘한 이치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가만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김대성이 다시 태어나는 세 번의 과정이다. 처음에 대성은 가난한 부모 아래에서 좋은 머리를 가지고 태어났다. 이어서 두 번째는 좋은 머리를 잘 써 부잣집에 다시 태어난다. 그러나 진정한 그의 탄생은 세 번째이다. 꿈에서 곰 귀신을 만난 다음, 인생의 바른 가치를 깨닫는 이 마지막 탄생이야말로 대성의 진정한 탄생이었다. 일연은 그때부터가 참된 삶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석굴암과 김대성.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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