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국의 회화
김명국은 그 이름 석자보다도 <달마도(그림1)>라는 그림으로 더 유명한 조선중기 화가이다. 그의 호인 '취옹' (醉翁: 술 취한 늙은이) 에서 풍겨 나오는 이미지와 마치 술 취한 상태에 서 울분을 토해내듯 아무 거리낌없이 그어내린 이 그림을 통하여 그가 그 시대에 인정받지 못한 아웃사이더였음을 이끌어 내기란 어렵지 않다.
특히 그는 신분제도가 엄격 하였던 조선시대에 양반이 아닌 국가에 고용된 일개 환쟁 이 에 지나지 않았으며 소위 성리학이라는 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관념을 지배하던 상황 속에서 그가 주업으로 삼았던 그림 은 더군다나 하찮은 것이었다.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 자신의 천재를 술로써 달랬던 김명국의 생애와 그림은 어떠 하였을까?
김명국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다. 1600년 태생으로 씌어 있는 책이 있지만 그것도 확실한 것이 아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항은 본 관은 안산(安山), 호는 연담(蓮潭) 또는 취옹, 개명하여명국(命國)이라고 했는데 鳴國으로 쓰인 문헌도 있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畵 員)이었으며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두 차례에 걸쳐일본에 다녀온 바 있다.
이상이 지금까지 알려진 그의 인적사항의 전부로 이처럼 그에 관한 기록이 박약한 것은 환장이를 천시하는 당시 풍토 에 비춰보면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그러나 그가 죽고난 반세기 후 상황은 달라진다.
임진왜란 이후 신분제에 동요가 생기면서 소위 중인 계층이 역사의 무대에 부상하 게 되고 영 정조 문예부흥기를 맞이하여 문예 전반에 활기가 돌면서 그림이나 음악에 재능이 풍부한 그러나 제대로 인정 받지 못해 기인(奇人)으로 살다간 사람들의 전기가 대거 쓰여지면서 그는 당대에 받지 못한 평가를 받게 된다.
즉 그는 그 이전 어떤 대가 도 받지 못한 "신필(神筆)" 이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게된 것이다. 그에게 있어 술은 창작의촉매제였다. 훗날 그를 신품(神品)으로 극찬하였던 남태응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김명국은 성격이 호방하고 술을 좋아하여 남이 그림을 요구하면 곧 술부터 찾았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그 재주 가 다 나오질 않았고,또 술에 만취하면 만취해서 제대로 잘 그릴 수가 없었다.
오직 술에 취하고는 싶으나 아직은 덜 취한 상태에서만 오로지 잘 그릴 수 있었으니 그와 같이 잘된 그림은 아주 드물고 세상에 전하는 그림 중에는 술이 덜 취하거나 아주 취해 버린 상태에서 그린 것이많아 마치 용과 지렁이가 서로 섞여 있는 것 같았다."
실제 그의 작품에서도 걸작과 실패작이 뒤섞여 있는데 술 이 창작의 촉매제였건아니었건, 그취하는 정도에 따라 작 과 타작이 섞여 나왔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러나 남태응은 그것을 그의 미천한 신분, 그리고 싶지 않을 때도 어쩔수 없이 그려야만 했던 화원이라는 신분적 제 약으로 돌리는 관대함을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던 <달마도(그림 1 )>는 인도 불교의 28대 교주로 중국에 건너와 소림사에서 면 벽구년의 수도 후 선종을 개창 한 달마대사의 초상이다. 활달한 필치로 아무 거리낌 없이 그어내린 몇 가닥의 선으로 달마대사의 이미지를 형상화시키고 얼굴을 묘사하는 데서는 엷은 먹을 사용한 빠른 필치로 그의 이국적인 풍모와함께 깊은 정신세계를 극명 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동양화에서 말하는 운필(運筆)의 힘과 선의 함축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실감할 수 있으며 겉모양을 비슷하게 그리는 것 이 아니라 대상의 내면세계를 표출하는데 더 높은 뜻을 두었던 수묵화의 정신이 무엇 인가를 알아차리게 된다.
그는 인물화 뿐만 아니라 산수화에 있어서도 호방한 필치를 보여준다. 나귀를 탄 채 먼길을 떠나는 노 인과 그를 떠나보내는 아쉬움 을 사립문에 기대어 달래는 사람 사이의 따뜻한 인정을 차가운 설 경(雪景) 속에 대조시킨 <설중귀려도(雪中歸驢圖)(그림2)>는 강한 필묵 법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얼핏 보기에는 거칠게 그린 것 같지만 인물과 나귀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집이나 다리를 그린 것을 보면 대상을 아주 명쾌하게 잡아내고 있다. 인물을 이와 같이 설정하고 난 다음 빠른 필치로 붓가는대 로 그려나간 산세와 나뭇가지 그리고 넝쿨과 태점은 그의 분방한 개성과 붓놀림을 여실히 느끼게 해 준다.
작품에서도 느낄수 있었듯이 그는 그 시대 기인이었고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한다. 그는 비록 시대를 잘못 타고나 당대에 그 재능을 인정받 지 못했지만 그 자신의 개성은 작품 속에 남아 반세기 후 숱한 찬사를 받았으며 300년후의 우리들에게도 빛을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