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을 위한 행진곡 및 가사
<임을 위한 행진곡〉은 군사정권 하에서 유포와 가창이 금지되었던 탓에 주로 구전의 방식으로 전해졌으므로, 부르는 사람에 따라 가사와 가락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진 가사와 대한민국의 공식 5·18 민주화운동 추념식에서 기념곡으로 제창된 바 있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4]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
” |
5.18민주화 항쟁의 날입니다.
원인과 배경
유신체제의 폭압정치에 눌려있던 국민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에 나섰으며 특히, 10.26사태 후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뒤에는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돼어 갔다. 그러나 12.12사태로 전두환을 중심으로한 신군부 세력들은,
국민이 원하던 민주주의를 저버리고 말았고,1980년 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신군부 세력은 이에 5.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이떄 광주에서는 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 전남대 교문앞에 20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시위를 하였는데 공수부대가 과잉 진압을 하여 부상자가 많이 발생한다. 그러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하였고, 이를 저지하던 공수부대는 몽둥이와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사살하였다.
19일에 드디어 참다 못해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하며 5.18민주화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 되었다.
2.민주화 항쟁의 과정
5월 20일 광주 시민들은 시청을 접수,차량시위를 벌이고 광주문화방송국을 불태우는 등 시위가 많이 격해졌다. (방송국을 태운 이유는 편파방송 때문이라고함)
일부 시민들은 광주 외곽지역으로 나가 광주의 상황을 보고하였다.
계엄군은 21일 외곽으로 철수, 그 날 오후 시민들은 전라남도 도청을 접수하는 상태까지 간다. 하지만 광주는 외부와 고립됀 채 스스로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고,선정활동을 하며 계엄 해체,학살 책임자 처단 등을 요구하였다.
더욱 놀라운건 이 자치 기간 동안 한 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는것
이러한 사태가 계속 돼지 않게 정부와 타협하자는 쪽과 벙부의 퇴전,언론조작 중지등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항전하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는 광주의 민주화운동을 폭도들이 주도하는 난동으로 규정 광주지역의 통신과 교통을 단절 하여 외부와 격리시켰다.
21일 계엄군은 광주 시민에게 무자비하게 발포,도로를 점령,도로를 지나가는 양민들을 학살하기 했다고 한다. 계엄군은 26일부터 진압 작전에 나서 광주 시내로 진격 27일 새벽에 상황실에서 끝까지 싸우던 시민군을 사살 도청을 접수하면서 10일간의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린다.
166명 사망 47 행방불명 2800명의 중경상 , 627구속 175명이 군사재판에 기소 5명 사형 7명 무기징역
3.광주 민주화 항쟁에 결과
신군부의 개입으로 실패
4.광주 민주화 항쟁에 영향
전두환정부는 집권 기간 내내 도덕성과 정통성에서 비난을 받음
주한 미군사령관이 광주의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광주 진입을 허용했다는 주장이 일면서 반미운동이 일어나기 시작 1988 노태우 정부가 들어서고, 정식으로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규정하였고,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노태우 등 책임자들을 구속, 희생자 가족들한테 보상이 정해졌다. 2011년 5.18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국제자문위원회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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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희생자 가족들을 위해 애도합시다...
봄볕 내리는 날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져 흩어지고 꽃향기 머무는 날
묘비없는 죽음에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
이렇듯 봄이 가고 꽃피고 지도록
멀리 오월의 하늘 끝에 꽃바람 다하도록
해기우는 분숫가에 스몄던 넋이 살아
앙천의 눈매 되뜨는 이 짙은 오월이여
사랑이여 내 사랑이여